가족과 쓰루가 성의 초상화

후쿠시마현의 명문・명가에 뿌리를 가진 성씨 30선

일본 전국 어디의 토지에서도, 이른바 「 현지의 명사 」라고 속삭여지는 명문·명가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매우 보통의 일반 가정입니다」라고 하는 분이라도, 자주(잘) 조상을 추적하면 실은 유서 있는 무가의 가문이었다…라고 하는 것도 드물지 않습니다.

이번 기사에서는, 후쿠시마현내 각지의 명문·명가라고 불리는 성에 대해 조사해 보았습니다. 「동급생에게 그런 성씨의 사람이 있었구나…


후쿠시마현내의 명문・명가로 이어지는 성씨 30선( 50 음순)

후쿠시마현의 명가는, 전국시대의 유력 다이묘였던 아나나씨・다테씨・히타리쿠국(현:이바라키현)의 사타케씨, 그리고 에도기의 아이즈번, 후쿠시마현 각지에 점재하고 있던 소번의 번주와…무가에 뿌리를 가진 가문이 많은 인상입니다.

아키타(아키타)

미하루 번주. 리쿠오쿠·데와의 전국 다이묘 안토씨의 후예로, 게다가 헤이안 시대 중후기의 무장· 아베 사다이토(아베노사다토) 의 후손이라고도 불리지만 진위는 불명.

원래는 쓰가루의 호족이었지만 해로를 능숙하게 사용해 현재의 아키타, 아오모리, 홋카이도 하코다테 주변을 지배해, 해적과 같은 일면도. 한때 히야마 안토씨, 미나미야스히토씨와 헤어지지만, 안도 아이 시대에 다시 양가가 통합되어 토자키 미나미성(아키타시)을 거성으로 아키타씨로 개칭 한다.

세키가하라의 합전 후, 히타치 쿠니 시로토(현: 이바라키현 가사마시)로 옮겨, 1645년에 다시 육오쿠쿠니 산하루(현: 후쿠시마현 미하루초)에 전봉이 되었다. 미하루의 향토 완구 「삼춘 인형」 을 낳은 것으로도 유명.

蘆名 (아시나)

아이즈의 전국 다이묘.

사가미국 미우라군 소나(현: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 아시나) 출신으로, 미우라씨의 일족. 겐토요조의 오슈 합전에서 공을 들고 아이즈에게 소령을 받은 것이 시작으로, 16대 당주 아나모리 우지 의 시대에 아이즈 일엔을 지배해 아나나씨의 최대판도를 쌓는다.

20대 당주·소나 요시히로의 때에 스리가미하라 합전으로 다테 마사무네에게 패해, 히타치의 사타케 씨에게 몸을 맡긴다, 그 후 일시는 히타치의 땅에 소령을 얻고 다이묘에게 복귀하지만, 세키가하라 합전 후에 소령이 몰수되어, 사타케 요시노부에 따라 출우(현:아키타현)로 옮겨

사타케 가신으로서 데와 쿠니가쿠칸 성에 1만 6,000석을 주어졌지만, 마지막 당주 아소나 치즈루마루가 3세에 사고 죽어 주가는 단절했다.

그 후, 소나가 일문중의 침생씨가 다테씨를 섬기고 나나에게 복성하고 있다.

아베(아베)

타나쿠라번(현:후쿠시마현 히가시시라카와군 주변)의 번주. 요요 도쿠가와 장군가를 섬긴 일족으로, 16대 아베 마사시요(아베 마사키요)가 1866년에 육안 시라카와 10만석보다 다나쿠라 10만석으로 전봉.

戊辰 전쟁에서 오우 에츠 열 번 동맹에 참가해 패배, 일단 개역되지만 메이지 원년에 계단창 땅에서 재흥(4만~6만석 정도로 감봉처분)했다.

안도(안도)

이와키 히라번 번주. 1758년에 미노 카나번에서 입봉한 쓰시마 모리계 안도가의 일족.

역대 번주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제5대 번주 안도 노부 마사에서 사쿠라다 문 밖의 변후에 노중으로서 막정을 주도했다.

戊辰 전쟁에서는 오우 고시 열번 동맹에 가입하여 신정부군과 적대. 반성평성에서의 공방전으로 패배하고, 반성평성은 소실했다. 유신 후, 신정은 근신을 강요당하지만, 1869년(메이지 2년)에 영가이의 처분이 풀리고, 1884년에 자작가가 된다.

이시카와(이시카와)

오랜 세월 육안 오쿠고쿠 이시카와군(현:후쿠시마현 이시카와군)의 다이묘였지만,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슈 마치에서 개역. 다테씨 중신이 되어, 에도 시대에는 센다이 번 중에서 일문 수석의 자리 에 있었다.

메이지 유신 후에는 홋카이도 개척에 임하지만 실패. 후에 카쿠다 쵸장(현:미야기현 카쿠다시) 등을 맡았다.

이타쿠라(타쿠라)

전국 시대부터 요요 마츠다이라 씨를 섬기고, 에도 시대에는 이타쿠라 4가가 악보 다이묘로서 각각 비중 마쓰야마 번주·우에노 안나카 번주·리쿠오쿠 후쿠시마 번주·비나카마테 세번주가 되었다.

1702년 중창류 이타쿠라가가 3만석으로 후쿠시마 번주가 되었다. 14대 이타쿠라 카츠미 때 오우바 열번동맹에 가입해 신정부군에 패배, 미카와 시게하라로 이봉된다. 그 후 1884년에 자작가가 된다.

이후카(이부카)

아이즈 구 가라고 불리는 아이즈 번의 명문.

전국시대부터 보과가의 중신으로 보과가 가로였던 이후카 시게코는 보과 마사유키의 장송 때 매장의 제식에 동석이 허용된 7명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에도 막부 말기에 번주 마쓰다이라 용보의 측근이었던 이후 카야테 우에몬 중의(이부카타쿠에몬시게요시) 가 저명.

게다가 소니 창업자 중 한 명인 이후 카 마사루 씨 도 아이즈이 후카야의 혈통이 된다.

猪苗代 (이름 수, 대나무 대)

아이즈의 국중에서 노나 씨의 지류. 미우라 씨의 일족인 사하라 씨의 사하라 모리렌의 장남 경련이 이나에요에 있어 이노요시로 씨를 칭한 것을 시작. 아나나씨가 다테씨에게 패한 스리가미하라 합전에서는 아버지인 모리쿠니가 다테씨 측, 아이인 모리카타가 아나나씨 측에 대해 부자로 싸웠다.

그 후 패한 모리 씨는 노나 씨와 함께 상륙으로 도망쳐, 부모리 국은 막부 말까지 센다이 번사로서 다테가를 섬겼다.

의사이자 세균학자로 유명한 노구치 히데요 의 아버지의 친가 "오히로야마 씨"가 이나에요 씨의 후손에 해당한다는 설이 있다.

이와키

육안국 이와키군(현:후쿠시마현 이와키시)의 전국 다이묘.

이와시로 씨 11대 당주·소류의 무렵에 사타케씨에 종속해, 15대 당주·시타카타의 대가 되면, 인근의 소마씨와 타무라씨와의 항쟁이 격화한다. 시게타카는 딸인 쿠보히메를 다테 하루무에게 아내가 하고, 그 녀석인 친류를 양각자로 맞이했다.

17대 당주·소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에 참진해 오슈 처치를 극복하지만 그 후 병사. 아이인 마사타카는 어렸기 때문에, 사타케 요시시게의 3남 사다타카가 이와키씨를 이어갔다.

그 후 준류인 마사타카는 다테가를 섬기고 일문이 되어 이와 타니도 다테가 를 자칭한다. 이와시로가를 이은 사다 타카는 세키가하라 합전에의 불참으로 개역이 되어, 시나노쿠니 나카무라 1만석의 소 다이묘로서 복귀 후, 데바쿠니 가메다번(현:아키타현 유리본소시 이와시로 가메다) 2만석의 번주가 된다.

우치이케(우치이케)

신부군의 세가미주쿠(현:후쿠시마현 후쿠시마시)에서 오미야라고 호한 호상. 야쓰시로메 영년은 40세에 일찍 가독을 양도해, 와카야마로 유학. 귀국 후에 ‘미치노쿠 사중’을 결성해 국학자로 활약했다.

오우치(집)

육안국 아다치군 동부(현:후쿠시마현 아다치군)의 국중. 전국 시대의 무장으로 오하마 성주의 오우치 정강이 가 저명.

타무라씨로부터의 독립 후, 소세력 때문에 주변의 대세력에의 협순·배신을 반복하지만 최종적으로 다테씨에게 귀참. 다테 마사무네가 이와데야마성에 전봉되면, 담택군(현: 이와테현) 마에자와 성주가 되어 약 10,000석의 소령을 주어졌다.

세키가하라 전투 때에는 교토 다테야시키의 유수거역을 맡았고 나중에 다테가 일족의 가격 을 받았다.

현다(걸었다)

육안국 다테군(현:후쿠시마현 다테시)의 국중. 다테군 영산의 현다성에 근거해, 전국시대에는 다테씨에 종속하지만, 다테 야무네·하루무네 부자의 싸움인 천문의 난에서 이나무네측에 걸려 패한 것으로 현다성이 폐성이 된다.

그 후 하루종에게 쏘아 싸움을 도전하지만 패해, 준코와 함께 끊어져 우에다씨는 멸망했다.

가토다(카토다)

육안국 시라카와군(현:후쿠시마현 시라카와시)의 국중.

주가인 시라카와 유키씨의 서류로, 시라카와 유키씨 3대 당주·유키 현조의 차남·아사시게로부터 4대 후의 중계가 가동다향을 영위해 가동다성(천왕관)을 축성해, 가동다씨를 자칭했다고 한다.

사타케씨와 싸우지만 패해 거성을 빼앗긴다. 나중에 다테씨를 섬기게 되어 에도 시대에는 센다이 번사가 되었다.

금상(가나가미)

리쿠오쿠니가와누마군 및 에치고국 가마바라군의 아가노가와 상류역을 본거로 한 전국 다이묘・소나씨의 일족.

전국시대의 제15대 당주 가미가모리하루가 가장 저명한 인물로, 그 탁월한 정치 수완으로부터 「소나의 집권」 이라고 칭했지만, 스리카미하라의 싸움으로 다테 마사무네에게 패해 토사. 일족은 다테 씨를 섬기고 에도시대에는 센다이 번사가 되었다.

萱野 (카야 노)

아이즈번의 명가로 대대로권무위를 칭했다. 에도막부 말기의 아이즈번 가로·萱野長修(카야노 나가하루) 가 저명하고, 戊辰 전쟁에 패한 아이즈번의 책임자로서 처형되었다.

장수는 1도류 미조구파의 상전자로, 자신의 처형전에 같은 에도 저택에서 근신했던 친척의 이후카테에몬에, 화젓가락을 사용해 1도류 미루구치파의 오의 「좌우전화 출신지비 태도」 를 전수했다고 한다.

쿠라타(쿠라타)

와카마츠 성하(현:아이즈 와카마츠시)의 호상. 가모 씨향의 아이즈 전봉 때 성시를 만들기에 노력해 마을 노인이 되었다. 에도시대에 오마치의 본가와 바바초의 분가의 2가로 나뉘었다.

사이고(사이고)

사이고가는 원래 보과 정승에서 시작되는 가계로, 정승의 형인 신슈 고원 번주·보과 정직에서 아이즈 번 초대 번주·보과 마사유키로 이어지는 보과가의 분류.

요요 아이즈 번가 노직을 맡고, 정승에서 세고 4대째의 근방이 생가의 사이고 성으로 복귀하고, 아이즈 사이고가의 초대가 된다.

막부 말기의 아이즈 번가로· 사이고 요모(사이고우타노모) 가 저명. 게다가 그 입양자인 시로 는, 유도가로서 강도관 시텐노에 갇혀 「모습 산시로」 의 모델이 된 것으로도 유명.

시마노스키(시마누키)

신부군의 세가미주쿠(현:후쿠시마현 후쿠시마시)에서 곡옥 이라고 부르고 미곡가나 여장을 경영한 호상. 나중에 오쿠니야로 개칭해 금융업·주조업으로 돌아섰다.

메이지 30년대에 건축된 동가 주택은 2013년에 국가 등록 유형 문화재가 되었다.

링크 : 문화청 “문화유산 온라인” – 세가미시마 관본가 주택 주택

시라카와(시라카와)

정식으로는 시라카와 유키 씨라고 칭하고 시모소 유키 씨의 서류로 종가와 구별하기 위해 시라카와 씨, 리쿠 오 유키 씨라고도 불린다.

가마쿠라 시대의 고가인 유키 스케히로 가 시라카와 쇼로 옮겨 살았던 것이 시라카와 유키씨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시라카와 유키가 3대 당주·현조 때 형제간에 소령이 분할되어 동생·아침 항상은 코미네성이 주어져 코미네씨(코미네시)를 칭했다.

전국 시대에 들어가면 시라카와 유키가와 코미네 씨의 동족 사이에서 내분이 끊임없이 발생. 게다가 사타케씨 등의 침공을 받아 서서히 쇠퇴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슈 마치에 의해 개역이 되었다.

후손에는 시라카와 유키씨 11대 당주의 아들로 아키타 사타케가를 섬긴 아사츠나의 혈맥인 아키타 시라카와씨, 시라카와 유키씨 12대 당주인 코미네 요시부모의 혈맥인 센다이 시라카와씨 등이 존재한다.

소마(소마)

육안국 소마군(현:후쿠시마현 소마시 주변)의 전국 다이묘.

가마쿠라 시대의 어가인·지바 상원의 2남·사상이 시모소국 소마군(현:지바현 카시와시~이바라키현 취수시 주변)을 영위해 소마를 칭한 것이 조로 된다.

1189년의 오슈 합전에서 공을 올렸고, 겐토쿠 아침보다 육오쿠니 행방군(후쿠시마현 소마시 주변)을 주어졌다. 하지만 실제로 이주한 것은 제6대 당주· 소마 시게하루(그렇게 말했네) 때로, 1323년의 일로 되어 있다.

시게하루는 행방군 오타카(난소마시 오타카구)에 코타카성을 구축해 본거지로 오슈 소마씨의 조가 되었다.

다테씨와 세력을 다투고 항쟁을 반복해, 세키가하라의 합전 후에 불참을 이유로 개역되었지만, 1602년의 도쿠가와 이에미츠 탄생의 경사에 의해 요시츠네의 아들 이분에게 본령이 안도되었다.

이후 1871년의 폐번치현까지 번지사를 맡아, 실질 1323년의 이주로부터 550년 가까이에 걸쳐 한번도 영지 바꾸는 일 없이 한 나라를 다스린 드문 무장이다.

타치바나 (타치바나)

서투른 번(현:후쿠시마현 다테시)의 번주.

정쟁에 패한 미이케번(현:후쿠오카현 오무타시)의 타치바나가가, 1806년에 육오국 다테군 하수도에 좌천된 것에 의해 1만석으로 입번한 것이 시작.

메이지 유신 후에 다시 미이케번으로 돌아가 자작가가 되어 귀족원의 의원 등을 배출했다.

다테(다테)

육안의 전국 다이묘.

가마쿠라 시대에 고가인이었던 다테 아사무네가 오슈 합전에서 노부오군(현 후쿠시마현 후쿠시마시)의 사토 기치를 공략한 공적으로부터 육오국 다테군(현 후쿠시마현 다테시)을 주어 다테라고 칭한 것이 시작으로 그 이전에는 나카무라를 자칭했다고 한다.

15대 당주 다테하루무네의 시대에 거점을 요네자와성(현:야마가타현 요네자와시)로 옮겨, 17대 당주· 다테 마사무네(다테 마사무네) 의 시대에 니혼마쓰시, 아나나씨를 토벌, 오사키, 타무라, 이시카와, 시라카와 등의 도호쿠 제 다이묘를 따르고, 다테씨 최대.

그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슈 마치에 의해 거점을 이와데야마(현:미야기현 오사키시)로 옮겨, 세키가하라 합전 후의 1601년에 센다이로 옮긴다. 에도시대에는 센다이 번주 가 된다.

타무라(타무라)

리쿠오쿠니타무라군의 전국 다이묘. 성의대 장군으로서 유명한 사카우에다무라 마로의 후예 라고 불리지만 여러 설이 있다. 타무라를 칭해 이토씨, 니카이도씨, 이시카와씨 등을 공격해 세력을 확대했다. 다테 마사무네의 정실인 애희의 친가근으로도 유명.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슈 마사지에 의해 개역이 되었지만, 후에 센다이 번 2대 번주 다테 충종의 3남 소라가 타무라가를 재흥해, 후의 일관 번주가 되었다.

니카이도(니카이도)

육안국 스가가와(현:후쿠시마현 스가가와시)의 전국 다이묘.

1444년경, 가마쿠라에서 니카이도 가씨가 스가가와로 하향해, 명령에 따르지 않게 된 스가가와 다이칸 니카이도 지부 다이스케를 토벌해 스가가와성에 들어간 것이 스가가와 니카이도씨의 초대 당주로 여겨지고 있다.

스가가와성을 거점으로 전국 다이묘가 되었지만 1589년 다테 마사무네에게 공격받아 낙성했다. 당시 니카이도 씨는 당주가 조세해 당주 대행을 하고 있던 것은 마사무네의 백모에 해당하는 아난이었지만, 낙성 후 아난은 마사무네를 싫어하고 조카의 이와키 상류를 의지하고, 상류의 사후는 사타케 요시노부의 근원에 몸을 담았다.

니혼마츠(니혼마츠)

육안국 아다치군 니혼마쓰성(현:후쿠시마현 니혼마츠시)에 근거한 전국 다이묘. 니혼마츠하타야마씨, 오슈하타야마씨와도. 무로마치 막부 오슈 관령·하타야마 쿠니씨의 아이, 국정이 조로 된다.

거점으로 한 니혼마츠의 지명에서 니혼마츠시를 칭했다. 전국시대는 다테씨·소나씨 등의 유력한 다이묘의 틈에서 고통받고, 마사무네의 아버지인 다테키무네의 납치를 기획해 실패. 당주·니혼마츠 요시츠네는 전사해 이듬해 니혼마츠성도 낙성해 멸망했다.

丹羽 (니와)

니혼마츠번의 번주.

1643년에 전국 무장,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서 유명한 탄바 나가히데의 손자에 해당하는 탄바 미츠시게 가 니혼마쓰에 입부해, 메이지 4년의 폐번치현에 의해 니혼마쓰번이 폐번이 될 때까지 200년 이상에 걸쳐 동지를 다스렸다.

막부 말기에 오우코시 열번 동맹에 걸렸기 때문에 메이지 유신 후에 5만석으로 감지되지만, 1884년(메이지 17년)에는 자작가가 된다.

호리키리

신부군 이자카무라(현:후쿠시마현 후쿠시마시)의 호농·호상.

전당포·주조업·광산 경영과 다각 경영을 실시해, 오쇼야도 맡았다. 메이지 유신 후의 당주 호리키리 요시 로는 도쿄 시장이나 내무 대신 등을 맡았다.

후쿠시마 이자카 온천에 있는 메이지 시대에 건축된 동가의 저택은 관광 시설로 보존·공개되고 있다.

링크: 관광 교류 시설 구호리 절저

혼다(혼다)

리쿠오이즈미 번(현:후쿠시마현 이와키시) 번주. 시라카와 번주 혼다 타다요시의 삼남 충사가 육오국 이시카와군에서 아버지의 소령으로부터 1만석을 분지된 것이 조로 된다.

그 후 일족은 미카와국·토에국·야마토국과 이봉이 이어지지만, 혼다 충여의 때 육오천 번에 다시 이봉된다. 막부 말기에 막부 측에 부여해 신정부군과 싸우지만, 당주였던 혼다 타다키의 강제 은거에 의한 대체로 존속해, 1871년(메이지 4년)의 폐번치현까지 동지를 다스렸다.

마츠다이라(마츠다이라)

아이즈 번주.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3남으로, 3대 장군 이에미츠의 이모동생인 보과 마사유키(호시나마사유키) 가 조.

1643년에 데와 20만석에서 아이즈 23만석으로 전봉. 이후 막말까지 동지를 다스린다.

에도막부 말기의 번주· 마츠다이라 요시모(마츠다 이라카타모리) 는 교토 수호직을 맡고, 다이세이 봉환 후에 오우에고시 열번 동맹을 결성해 신정부군과 싸우는 것도 패배. 메이지 원년에 육안두남번 3만석에 감전봉이 되어, 1884년에 자작이 되었다.

야마가와(야마카와)

전국시대부터 보과가를 섬기고, 에도시대는 아이즈번주가 된다.

아이즈 전쟁 중에 아이즈 번가 노에게 맡겨, 쓰루가성 농성전의 총 지휘관으로서 싸운 야마가와 코우( 야마가와 오조 ) 가 저명. 야마가와 히로시는 나중에 아이즈번이 전봉된 두남번의 대참사도 맡고, 1886년에는 육군 소장까지 진급해 남작의 지위에 서 있다.

덧붙여서 남동생 야마가와 켄지로 도 도쿄 제국 대학의 총장을 맡은 후 남작에게 서있다.


참고서적: 47 도도부현 당지문화백과·후쿠시마현 – 마루젠 출판


도호쿠 각 현의 명문 · 명가에 뿌리를 가진 성씨 시리즈


기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