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테현 가마이시시】일본 최초의 해도 「육중국 가마이시 항지 圖」와 가마이시의 발전(전편)

일본 지도의 작성이라고 하면 관정 12년에 전국 측량을 실시한 「이노 타다타카」. 그럼 일본 최초의 해도가 제작된 것은?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어느 항구나 바다, 제작 배경을 떠올릴 것입니다, 나는 역시 에도 시대에 쇄국 정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인공의 섬 “데지마”나 막부 말기에 페리가 흑선으로 내항한 땅, “ 우라가(현재의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 동부)」가 최초의 해도였던 것은? 등 떠오릅니다.

하지만 사실은 다릅니다. 일본 최초의 해도는 「육중국 가마이시 항지 圖(리쿠츄노쿠니카마이시코노즈) 로 되어 현재의 이와테현 가마이시시의 가마이시항이 되는 것입니다.


일본 해도를 할 수 있을 때까지

海瀕舟行図
『카이코후나도(海辺之絵図)』(교토대학 부속도서관 소장): https://rmda.kulib.kyoto-u.ac.jp/item/rb00022925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담당했을 무렵에는 고슈인선 무역이 활발해 유럽에서 사용되고 있던 「포르트라노 해도」 가 일본에서도 많이 만들어져, 국내의 선원들은 포르트라노 해도 를 이용해 멀리 떨어진 루손(필리핀 제도 중 하나), 캄보자(캄보디아), 샴(태국) 등 남쪽 바다로 나갔습니다.

에도시대가 되면 일본은 쇄국령 때문에 해외도항이 금지되어 해도가 필요하지 않은 시대가 이어졌습니다. 일본에 쇄국을 멈추도록 요구해 온 나라는 항해 안전의 필요상으로 자국에서 측량을 실시해 상세한 정보를 기입하고 있었습니다. 막부는 외국인의 손에 의해 일본의 연안이 밝혀져 가는 것에 국방상의 불안을 느끼고, 스스로의 손으로 측량을 실시해 필요한 해도를 제작하는 결의를 했습니다.

한편, 야마가타의 사카타항을 기점으로 한 서회, 동회 항로가 발달해, 연안 항해용의 질소로 실용적인 항로의 안내도 “카이 빈주행도 많이 만들어져, 기타마에선 등에 이용되었습니다.

대일본 연해 건포 전도
〔이노 타다 타케/측량・제작〕〔대일본 연해 가로지 전도〕 제53도 육안

서두에 접한 이노 타다 타카가 전국 측량을 실시한 21년 후, 막부에 제출한 대일본 연안 배지 전도 「이노도(이노우즈)」는 일본의 해안선이 정확하게 측량되고 있었기 때문에, 막부 말기에 내항한 영국 해군은 이를 이용하여 일본 연안의 현대적인 해도를 작성했다고 합니다.


陸中國 가마이시 항지

육중국 가마이시 항지 圖
육중국 가마이시 항지 圖

원래 이, 「육중국 가마이시항지」「일본 해군 수로 기숙사(※수로 기숙사는 수로의 측량, 해도의 제작, 수로지의 편찬, 기상이나 해상의 관측 등, 항해의 보안에 관한 것을 담당한다 한 해군의 조직)」 이 스스로의 손으로 처음으로 측량해, 메이지 5년에 간행한 제1호 해도가 됩니다. 수심의 단위에는 심(“히로”라고 불리는 당시의 단위로 약 1.8 m)가 이용되어 시대 배경을 생각하면 선인의 고생이 추구됩니다.

그럼 왜 가마이시항이 일본 최초의 해도가 된 것인지,


철 생산지로서 중요한 땅이었던 가마이시

가마이시 광산
가마이시 광산

원래 이와테현 가마이시시는 철의 생산에 빠뜨릴 수 없는 「철광석」의 국내 최대의 산지이며, 메이지 14년, 메이지 정부가 관영의 제철소를 건설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마이시 항은 당시 도쿄와 하코다테 사이의 중간 보급 지점으로서 중요한 항구였고, 국내의 해도 제작에 있어서 관영 제철소 건설 직전이었기 때문에, 제1호 해도의 대상 항으로 선택되었다 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동회 해운으로 붐비는 미나토마치는, 제철의 마을로서 변모해 가고, 일찌기 5000명 미만이었던 작은 마을은 메이지 44년에 14,925명, 그리고 최성기인 1963년에는 92,123명이 되어 이와테현내에서도 모리오카 다음으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로 성장했습니다.


태평양전쟁 당시 엄청난 피해를 입은 가마이시시

1945년, 태평양 전쟁이 중대한 국면을 맞이하는 가운데, 전국의 주요 도시는 B29에 의한 공습을 받고, 한층 더 지방 도시까지 그 맹공이 퍼지는 상황 하에서, 오하시 지구에 철광 자원을 가지고,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자급이 가능한 제철소를 가진 공업도시였던 가마이시에서는 시민도 언젠가는 공습을 받을 것이라는 각오를 갖고 있는 동안 전시의 증산에 힘쓰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은 “일본의 중요산업을 파괴하고 수송을 혼란시키고 일본 국민의 전의를 저하시키기 위해”로 같은 해 7월 14일 부석시에 3척의 쾌속전함, 2척의 중순, 9척의 구축함에 의한 함포 사격을 실시하고, 또한, 같은 해 8월 9일에도 3척의 쾌속 전함, 4척의 중순, 10척의 구축함에 의해, 두번째의 함포 사격을 갔다.

이 두 번에 걸친 함포 사격과 함재기에 의한 공폭에 의해, 가마이시는 일면의 초토로 되어, 다수의 사상자를 낸 것 외에 제철소의 기능도 파괴되었습니다. 

가마이시시에서는 아직도 희생자수는 조사중이지만, 쇼와 51년 발행의 「부석함포 전재지」에서는 희생자수 753명의 이름이 기재되어, 그 후의 조사로 현재, 희생자 명부에 는 782명의 명칭이 있습니다.

이 태평양 전쟁 시의 엄청난 피해와 역사는 가마이시역 바로 옆의 가마이시시 향토 자료관에서 견학할 수 있습니다.

가마이시시 향토 자료관
가마이시시 향토 자료관

정보

  • 명칭 : 가마이시시 향토 자료관
  • 소재지 : 〒026-0031 이와테현 가마이시 스즈코초 15-2
  • 영업시간 : 9:30~16:30 ※최종입관은 16시
  • 입관료 : 어른 200엔/단체 100엔(20명 이상) ※유아, 초중학생, 고교생, 장애인 수첩을 가지고 계신 분은 무료
  • 휴관일 : 매주 화요일 ※연말연시(12월 28일부터 1월 4일까지)
  • URL : https://www.city.kamaishi.iwate.jp/kyou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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