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와테현의 명문・명가에 뿌리를 가진 성씨 30선
목차
- 1 이와테현내의 명문・명가로 이어지는 성씨 30선(50음순)
- 1.1 阿蘇沼 (아소누마 수)
- 1.2 언니(아네타이)
- 1.3 단독(이치노헤)
- 1.4 이와부치(이와부치)
- 1.5 에자시
- 1.6 오이카와(오이카와)
- 1.7 오타(오타)
- 1.8 오츠키 (오츠키)
- 1.9 가사이
- 1.10 카시와야마
- 1.11 가네코(카네코)
- 1.12 가메 가와 강 (키케가와)
- 1.13 쿠지 (추첨)
- 1.14 카츠마키(쿠즈마키)
- 1.15 구토(쿠노헤)
- 1.16 코나시
- 1.17 斯波 (주로)
- 1.18 새밭(토리하타)
- 1.19 나카무라(나카무라)
- 1.20 나라자카(나라사카)
- 1.21 楢山 (나라야마)
- 1.22 남부(난부)
- 1.23 하마다(하마)
- 1.24 稗貫
- 1.25 마에카와(마에카와)
- 1.26 무라이(무라이)
- 1.27 무라카미(무라카미)
- 1.28 야에하타(야에하타)
- 1.29 부재(루스)
- 1.30 와가(우리)
일본 전역의 모든 곳에서는 소위 "현지 유명한 사람들"이라는 소문이있는 유명하고 유명한 가족이 있습니다. 당신이 "우리는 매우 평범한 가족"이라고 말해도, 당신이 우리 조상을주의 깊게 추적한다면, 그들은 실제로 유서 깊은 사무라이의 가족에 속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번 기사에서는, 이와테현내 각지의 명문·명가라고 불리는 성에 대해 조사해 보았습니다. 「동급생에게 그런 성씨의 사람이 있었구나…
이와테현내의 명문・명가로 이어지는 성씨 30선( 50 음순)
이와테현의 명가는, 현 북쪽은 남부씨에 이어지는 가문, 현남은 다테씨와 카사이씨의 어느 쪽에 속하는 국중의 가문이 많은 인상입니다.
阿蘇沼 (아소누마 수)
후지와라 히데고의 후예인 후지 성 아시카가씨의 일족. 아시카가 아리즈나의 사남 아소누마 시로 히로즈나를 조로 하고, 시모노국 안소군 아소누마(현:도치기현 사노시 아사누마초)를 영위해 아소누마 또는 아소누마라고 칭한 것이 시작된다.
아소누마 시로 히로즈나는 1189년의 오슈 합전에서 공을 올려, 육오국 폐이군 토노호(토노 12향) 지두가 되지만 실제로는 현지에 가라앉지 않고 대관 통치를 실시한다. 그 후 히로즈나의 차남 친줄이 호마도야마(현: 토노시 마츠자키초)에 요코다성을 쌓아 올린 후, 그 후손은 토노에 토착했다.
언니(아네타이)
육오국 고베군(현:아오모리현 동부~이와테현 북부)의 국중. 현재 이와테현 니토군 이치도마치 언덕자관에 있던 니타이성에 근거해 쿠도씨에 속했다.
1591년의 「구도정실의 난」 에 있어서도 쿠도씨측으로서 도요토미군과 교전. 언덕성의 낙성과 함께 자칼했다.
단독(이치노헤)
남부가 초대광행의 장남, 행조가 서자(정실 이외의 아이)였기 때문에 남부가의 가독을 이어받지 않고, 이치토고(현:후토군 이치도초)에 근거한 것이 시작. 2대째 의실의 시대에 단독성을 쌓아 본거지로 비베군의 남문을 총회한 남부지족의 가문.
상기의 언덕씨와 마찬가지로 「구도 정실의 난」 에 있어서 쿠도씨 측에 부여한 것으로 남부 신직에 공격받아 이치호성은 낙성.
이 흐름으로 이치도 씨의 준류는 단절했다고 하지만 이치도 씨에게는 아라키다, 히라쇼, 쪽모이, 호리키리, 센토쿠 씨, 야기자와, 쓰가루이시, 에고, 네이자와, 에고, 노다, 폐이구치, 종시, 나가규, 타니우치, 나카무라, 얕은 돌, 십이야 등의 많은 분류가 존재하고, 그 일부는 메이지 이후 혼성의 단독 씨에게 복귀했다고 한다.
이와부치(이와부치)
시모소국 사루시마군 이와부치(현: 이바라키현 사루시마군)를 뿌리로 하는 육안국 이와이군의 국중. 전 9년의 역에 있어서 「황해의 전투」 로 알려진 요충, 황해(현:이치노세키시 후지사와쵸 황해)를 가마쿠라 시대 이후에 맡은 호족.
이후 반이군 일대에 퍼져 번영하지만, 1590년에 행해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슈 마치에 의해 일족은 이산해 버렸다고 한다.
에자시
陸奥国江刺郡의 국중. 카사이 씨의 서류로 여겨져 요요 이와타니 도성(현:오슈시 강자 이와타니 도칸시타)에 근거해 강자군을 지배했다. 1590년에 행해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슈 마치에 의해 소령을 몰수해 몰락해, 에도 시대 이후에 남부 번사가 된다.
정부 발표 통계 및 전국 전화 번호부 데이터를 바탕으로 전국의 명자 인원수를 게재하고 있는 명자 유래 net 에 따르면, 현재는 전국에 1,400명 정도의 에자씨가 존재하고, 약 30%에 해당하는 600명 정도가 미야기현에 분포하고 있다.
오이카와(오이카와)
리쿠오쿠니 이와이군(현:이치노세키시・니시이와이군 히라이즈미초・오슈시의 일부)의 국중. 카사이씨에 속해 이와이군 일대를 다스리는 오이카와씨는 이와이군·오키타호를 거점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카시와기성주의 오이카와 요시가를 두령으로 '오키타 오이카와당' 이라고 불렸다.
1559년에 치바 사부로 신근과 싸움 영몰수의 처분을 받지만, 이것을 불복으로 ‘카시와기성 사건’ 이 발생. 오하라씨에 의해 카시와기성은 진압되어 오이카와당은 토벌되었다.
오타(오타)
이와이군 카미오쿠타마무라(현:이치노세키시 치카마치)의 오쿠타마 주물사. 천명 주물사의 계보로 되어 북관동에서 신에쓰 지방까지 판로를 가지고 있었다. 메이지 이후에 카미가네야 라고 부르고 냄비·철병류를 제조하고 있었다.
오츠키 (오츠키)
원래는 카사이씨의 일족, 테라자키씨의 후예에서 카사이씨의 가신이었지만, 에도시대에 이와이군 야마메무라(현:이치노세키시)에서 귀농.
본가는 대대로 오간구를 세습하고, 분가는 의가가 되어 일관번의 번의를 배출하고, 그 후에도 한학자나 국어학자 등 많은 인재를 세상에 내보냈다.
가사이
육오국 중부(현재 미야기현 산리쿠 연안에서 이와테현 남부에 걸친 지역)를 통치한 대신(수군 규모의 국인 영주).
가마쿠라 시대에 무사시국·시모소국의 고가인·토시마씨 당주 토요시마 키요모토(청광)의 3남으로, 시모소국 카사이 미카리(현:도쿄도 카츠시카구·에도가와구·스미다구 주변)를 소령으로 카사이씨를 자칭한 카사이 키요시게가 조. 오슈전에서 무공을 세우고 오슈 후지와라씨가 멸망 후 오슈총봉행에 맡겨 육오국에 소령을 얻어 토착했다.
전국시대에는 테라이케성(현:미야기현 등미시)을 본거로 하여, 사슴·등미·혼요시·반이·담담·강자·기센의 카사이 7군 을 지배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 의 오슈 마치(1590년)에 의해 소령을 몰수해, 1597년에 제17대 당주였던 카사이 하루신의 사망으로 다이묘로서의 카사이씨는 멸망했다.
카시와야마
육안국 담택군의 국중. 출자는 제설 있어 분명하지 않다. 요요카사이씨에 따라, 오바야시성(현: 이와테현 담자와군 가나가사키초)을 거점으로 했다. 카사이 가신단 안에서 에자씨와 나란히 하는 중신으로, 다테씨의 천문의 난의 때는 다테 하루무네에게 아군한 것으로 한때는 주가를 능가하는 세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후계자 다툼이 일어나면서 점차 약화되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슈 마치에 의해 주가의 카사이가와 함께 개역되어 에도시대에는 남부 번사가 되었다.
가네코(카네코)
시바군 일식(현:시나미초)에서 미노야 라고 호한 호상. 우복상으로 성공한 후 금융업에도 착수. 4대째는 남부번의 계정 봉행에 발탁되어 무사로서 가네코, 상인으로서 세키를 자칭하고 있었다.
1849년에 번주였던 남부 리고가 미노모리가 된 것을 계기로 미노야에서 히쿠야 와 야호를 바꿨다.
가메 가와 강 (키케가와)
육안국 이와이군의 국중. 시모소쿠니 센다쇼 카메 가와가와무라(현 : 치바현)가 발상으로, 카사이야 초대인 카사이 키요시의 오슈 하향에 따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슈 처치(1590년)에 저항해, 카사이·오사키의 가신들로 구성된 일소군중에 가메 가쿠가와 일족의 면면과 함께 당주 가메 가쿠가와 노부히데도 아이들과 출진해, 후카야 쇼와후치무라에서 키무라 요시 청군과 싸우는 것처럼 죽었다.
쿠지 (추첨)
陸奥国久慈郡의 국중. 남부씨의 일족으로 남부 광행의 3남을 조로 하는 계보라고 하지만, 「육지 아베 씨족」의 계보를 그리는 것도 있다고 한다.
전국 말기의 당주, 쿠지 나오지는 쿠도 노부나카의 3남 정칙을 딸랑이로 했기 때문에, 텐쇼 19년(1591년)의 「쿠도 마사미의 난」 으로 쿠도 씨에게 하담해 패배. 나오지, 정칙이 함께 처형되어 쿠지씨의 종가는 단절했다.
쿠지 나오지의 동생인 폐이군 미야코 섭대촌(현: 이와테현 미야코시 타로) 영주·치코는 쿠도가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섭대 쿠지가 로서 존속해, 쿠지데와모리라고 칭했다.
카츠마키(쿠즈마키)
이와테현 이와테군 카츠마키쵸 타코에 있던 카츠마키성을 거점으로 하고 있던 육오국 고신군의 국중.
후지와라 미나미가의 흐름을 펌하는 쿠도씨의 일족으로 전해져 1189년 이와테군 지두직을 받은 쿠도 히로미츠의 분류가 응인년간에 카츠마키 마을에 이주한 것이 시작된다.
「쿠도 마사미의 난」 에서는 쿠도 씨의 초청을 거절하여 남부 씨에게 주어졌고, 에도기에는 남부 번사가 되었다.
구토(쿠노헤)
육오국 고신군을 본거로 한 전국 다이묘. 구토 마사미(쿠노헤 마사자네) 가 유명. 나카노 씨, 타카다 씨, 사카모토 씨, 우에노 씨, 코가루 쌀 씨, 에자 씨, 에자 가 씨, 누나 오비 씨 등이이 일족이라고합니다.
출자에게는 여러 설이 있어, 오랜 세월 남부씨의 조·겐코행(남부광행)의 6남, 구토 행련(쿠노헤 유키츠라)로 여겨져 왔지만, 남부 광행이 육오국으로 하향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지적되어, 쿠도 행련의 쿠도군 영유도 의문이 갖고 있다.
구토무라의 구토 신사전 「오가사와라계도」(현존하지 않고)에는 시라카와 유키씨 초대인 유키친조의 부하의 총대장, 오가사와라씨를 구토씨의 시조로 하는 기술이 있었다고 되어 있다.
1591년에 요도씨, 나나토씨, 쿠지씨 등과 함께 속에 말하는 「쿠도 마사미의 난」 을 일으켜, 이것이 오슈 처치에 대한 반발로 취해져, 가모 씨향을 비롯한 마치군에 진압되어 쿠도씨는 멸망했다.
코나시
육안국 이와이군의 국중. 육오일화산(현 :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 성주 가사이 하루하루의 사남 기요하루가 오나시성(현 : 이치노세키시 치카마치 오나시)에 근거해 오나시 씨를 칭했다. 카사이씨 멸망 후는 다테씨에 따라 에도기에 센다이 번사가 되었다.
斯波 (주로)
육안국 시나미군의 다카미즈데라성(현:시나미군 시나미쵸)에 근거해 타카미즈데라 이와나미씨라고 불리는 명문의 가문. 무로마치 막부 관령가 하나미 씨의 일족으로 '사나미고쇼', '奥の斯波殿' 이라고도 불렸다.
희관씨와 와가씨와 맺어 미토 남부씨에 대항하고 있었지만, 1588년에 남부 신직에 패해 멸망했다.
새밭(토리하타)
육안국 이와이군의 국중. 계무평씨의 후예인 오슈 지바씨의 서류로 여겨진다.
치바 씨 일족의 츠즈키가 카사이 씨 근신에 세워져 토리바타성(현 : 이치노세키시 히가시야마초 마쓰카와)에 근거한 것을 계기로 토리바타씨를 칭한다. 그 혈근은 나중에 귀농했다고 한다.
정부 발표 통계 및 전국 전화 번호부 데이터를 바탕으로 전국의 명자 인원수를 게재하고 있는 명자 유래 net 에 따르면, 현재는 전국에 700명 정도의 토바타씨가 존재하고, 그 중 약 150명 정도가 이와테현에 분포하고 있다.
나카무라(나카무라)
모리오카 성하 신곡초(현:모리오카시)의 호상. 이토야 와 호해 오복·헌옷 등을 취급해, 남부 번의 특산품인 「자근염」 을 한 손에 맡은 것으로 발전했다.
1861년경에 건축된 동가의 주택은 모리오카시 중앙공민관 부지 내에 이축되어 국가지정 중요문화재 로서 현존하고 있다.
링크: 모리오카시 공식 HP – 국가 지정 문화재 등 구나카무라가 주택
나라자카(나라사카)
육안국 이와이군의 국중. 카사이씨의 일족으로 이와이군 나라사카고(현:이치노세키시 하나센쵸)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나라사카씨를 칭했다. 대대로 카사이씨를 섬기고 있었지만 카사이씨의 멸망 후는 다테씨에게 신종. 에도기에 센다이 번사가 된다.
정부 발표 통계 및 전국 전화 번호부 데이터를 바탕으로 전국의 명자 인원수를 게재하고 있는 명자 유래 net 에 따르면, 현재는 전국에 400명 정도의 나라사카씨가 존재하고, 그 중 약 170명 정도가 미야기현에 분포하고 있다.
楢山 (나라야마)
남부가의 일문에서 대대로 가로를 맡은 가계. 남부가 고치중 (악보 상급 무사)로서, 요요 모리오카 성내마루에 저택을 짓고 있었다.
에도막부 말기의 남부번 수석가로였던 에야마 사도 는 번론을 사막에 정리해 오우우에시 열번동맹에 참가해, 패전 후에 참수되었다. 그 후 쿠야마가는 미야코시 가와이에서 근신했지만, 메이지 22년(1889년)에 정부로부터 가명 재흥의 은전을 받고 모리오카로 돌아왔다.
남부(난부)
전국 다이묘이며 메이지기에 화족이 된 씨족. 카이겐씨의 흐름을 펌핑하는 가가미 원광의 3남인 남부 광행이 가조로 여겨진다. 카이쿠니 거마군 남부향(현 : 야마나시현 남거마군 남부초)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남부씨라고 칭했다.
규신군에 쿠도시몬제를 깔아, 미츠유키의 장남의 행조가 이치도씨, 차남의 실광은 나중의 종가 미토 남부씨, 삼남의 실장은 하키이 남부씨와 네시로 남부씨, 사남의 아사키네는 시치토씨, 오남의 종청은 요도지에게 분출을 쿠오토씨와, 일족을. (이설도 있음)
에도시대에는 모리오카 번주가 되고, 유신 후에는 화족의 백작가가 된다.
하마다(하마)
육오국 게센군의 국중. 게센군 지바야작씨의 분류로 여겨진다. 3명의 형제가 하마다·다카다·장부와 분립해 타카다 만(현: 리쿠젠 타카다시)을 중심으로 세력을 넓혔다. 전국시대, 하마다씨는 카사이씨의 친족이 되어, 그 위광을 배경으로 세력을 더욱 넓히지만, 후에 카사이씨에게 배명해 쿠마가야씨, 혼요시씨 등과 항쟁을 계속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슈 마치에 의해 몰락해, 후에 남부가의 가신이 되었다고 한다.
稗貫
陸奥国稗貫郡의 국중. 그 일어나기에는 제설이 확실하지 않지만, 최근에는 무사시국 사이타마군 오노호를 본관지로 한 고가인 나카죠 씨가 오슈 합전에 의해 키타가미가와 유역의 희관군을 받은 것으로 시작된다고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슈 처치에 의해 개역되어 와가 씨와 함께 ‘와가·연관일규’ 를 일으키지만 처치군에 의해 진압되어 희관은 멸망한다.
그러나 그 후예는 센다이번사의 희관가, 만성목가, 남부번사의 세천가로 혈맥을 유지했다고 한다.
마에카와(마에카와)
폐이군 요시리 요시리(현:오츠키마치)의 호상. 토키와 쿠니 나카 미나토의 시라코야와 무역을 실시하고 있었다. 모리오카 번의 어용상인이 되어 에도에의 산품을 쌓아 올리는 한편 미소 거택 광산의 발굴 청부인이 되어, 다각 경영으로 발전했다.
무라이(무라이)
모리오카 성하(현:모리오카시)의 호상. 유상인으로 시작되어 2대째 때 모리오카번의 계정 봉행에 발탁된다. 4대째 모병위 때 남부번의 70만 양의 빚을 어깨 대신시켜 몰락했다.
무라카미(무라카미)
오미야 라고 호칭한 토노의 호상. 가사이 가가신으로 나중에 귀농한 무라카미 아이코가 가조로 여겨진다. 차상으로 성공했고 전당포와 주조업도 운영하고 있었다.
야에하타(야에하타)
陸奥国稗貫郡의 국중. 희관씨의 일족이라고 한다. 야에하타칸(현: 이와테현 하나마키시 이시토리야마치)에 근거해 희관씨에 속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슈 처치에 의해 주가의 희관씨와 함께 몰락했다.
정부 발표 통계 및 전국 전화 번호부 데이터를 바탕으로 전국의 명자 인원수를 게재하고 있는 명자 유래 net 에 따르면, 현재는 전국에 300명 정도의 야에하타씨가 존재하고, 그 절반 이상에 해당하는 약 190명 정도가 이와테현에 분포하고 있다.
부재(루스)
유수씨는, 후지와라 키타가 후지와라 미치카네의 현손이라고 칭한 이자와 가케이(이사와 이에카게) 를 조로 하는 사족으로, 오슈 정벌 후의 1190년에 가경이 겐토쿠조로부터 육오국 유수직에 임명되어, 후손이 그 지위를 세습한 것으로부터 역직을 그대로
13대의 유수지가 이후, 다테씨로부터 입양자가 차례차례로 보내져 그 영향하에 들어간다. 에도기에는 다테가의 일문으로서 다테로 개칭해 미즈사와를 영위해 「미즈사와 다테가」 라고 불렸다. 유신 후에는 부재중에 복성하여 사족이 된다.
와가(우리)
육안국 와가군의 국중. 그 출자는 문헌에 따라 여러 설이 있어, 「오쿠난 낙호집」에서는 원조를 겐토쿠 아침으로 하고, 「겐토 카즈카 계도」에서는 타다 식부 다이스케 타다아키, 와가 일족·오니야나기씨의 「오니야나기 문서」에서는, 가마쿠라 오카이인 나카죠 요시카츠(호교 성성)의 차남·성계.
전국기에는 카사이씨나 희관씨와 함께 미토 남부씨와 싸웠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슈 마치에 의해 개역.稗貫씨와 함께 「와가・稗貫一揆」 을 일으키지만 처치군에 의해 진압되어 멸망. 나중에 후예가 센다이 번사가 되고 있다.
정부 발표 통계 및 전국 전화 번호부 데이터를 바탕으로 전국의 명자 인원수를 게재하고 있는 명자 유래 net 에 의하면, 현재 전국에 2900명 정도의 와가씨가 존재해, 그 중 420명과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다 가 아키타현 요코테시에서, 이것은 「와가·희관일규」의 후, 와가씨는 니시와가 방면에 패주했다고 되어 있으므로, 그 일단이 그대로 오우바 산맥을 넘어 요코테시에 정착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참고서적: 47 도도부현 당지문화백과·이와테현 – 마루젠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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