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기현】수기적인 운명으로부터 일본 최초의 세계 일주를 하게 된 센다이 번 출신자들

여러분은 일본 최초의 세계 일주를 달성한 것은 센다이번 출신자였던 것은 아십니까?

이번 기사에서는 수기적인 운명으로부터 세계를 일주하게 된 센다이번 출신자들의 이야기를 간단히 설명합니다.


표류에서 시작된 세계 일주?

「세계 일주」라고 하면 뭔가 모험, 또는 외교나 탐색에 나온 것처럼 생각합니다만, 원래는 이시노마키에서 쌀과 목재를 실어 에도를 향해 출항한 배가 시오야자키 앞바다(현 후쿠시마현 이와키시)에서 미소유의 폭풍우에 맞서 조난해 버린 것이 세계 일주의 계기라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구사에 일생, 조난 후 승무원들

때는 1793(관정 5)년 11월, 위에서도 기재하고 있습니다만 시작은 이시노마키로부터 쌀과 목재를 쌓아, 16명의 승무원과 함께 에도를 향해 출항한 배입니다.

에도를 향해 출항한 배의 이름은 「와카미야마루」 .

그런데 출항한 화살촉에 시오야자키 앞바다에서 불운하게도 폭풍우를 만나 버립니다. 배는 시오야자키 앞바다에서 항로를 그것, 그대로 반년 정도 바다를 방황하게 됩니다.

배는 시오야자키 앞바다에서 그대로 조수의 흐름에 빠져, 다음해 1974(관정 6)년 5월에 북태평양의 알래스카 반도에서 캄차카 반도에 걸쳐 이어지는 알류샨 열도의 코지마에 표착했다고 합니다.

알류샨 열도에 표착했을 때, 승무원 16명은 기적적으로 전원 무사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표류중은 자재(쌀・목재 등)를 쌓고 있었기 때문에 식량은 있었습니다만 중요한 마시는 물이 빨리 없어져 버림에 견딜 필요가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도 죽지 않고 승무원 전원이 코지마에 표착했지만, 표착 직후에 선두는 죽어 버립니다.


알류샨 열도, 코지마에 표착하고 나서

선두를 잃고, 15명이 된 와카미야마루의 승무원들은 현지인에게 돕고 나아츠카섬에 옮겨져 원주민이나 낙지 사냥을 하고 있던 러시아인의 도움을 받으면서 1년 정도 현지에서 보내는 것 됩니다.

그리고, 1795(관정 7)년 5월에 러시아 본토로 보내집니다.

배는 오호츠크에서 시베리아를 건너, 한 줄은 이르쿠츠크로 향합니다. 다만, 이르쿠츠크로 향하는 도중, 여행의 심로로부터인가 와카미야마루의 승무원 1명이 생명을 떨어뜨리게 됩니다.


러시아 본토로 건너간 승무원(센다이 번 출신자)들

승무원 14명은 대략 8년간 러시아에서 보내게 됩니다.

체류 중에는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여 러시아로 귀화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 체류 중에 「귀화조 4명」과 「귀국희망조 10명」으로 나뉘게 됩니다.

다만, 이 긴(8년간) 체재중에 또 1명이 사망하게 됩니다.

때는 1803(享和3)년 4월, 사태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와카미야마루의 승무원 13명 일행은 황제 알렉산더 1세에 속견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게 됩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는 한 줄

어떤 행정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했는지는 불명합니다만 향하는 도중, 심로나 병에 의해 3명이 이르쿠츠크로 돌아가게 됩니다.

10명이 된 일행은 무사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해, 황제 알렉산드르 1세와의 겸견 후귀국의 의사를 확인되게 됩니다.

여기서 귀국조와 귀화조로 의견이 나뉘어져 최종적으로 「쓰타오, 의병위, 타쥬로, 사다히라」의 4명이 귀국을 희망, 그 외 6명은 러시아에 남는 것을 결의한다 되었습니다.

다만, 이 표류민 일행의 송환은 일본과의 통상협상을 유리하게 하는 논의가 있었다고 합니다.


드디어 귀국이 된 5명, 그 행정은?

귀국한 쓰타오의 항해도정도

1803(享和3)년 7월 통역으로 동선하게 된 선록 (귀화조)과 귀국 희망의 4명의 총 5명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출발.

코펜하겐(덴마크)으로 향하고, 그대로 팔마스(영국)에서 항로로 테네리페(카나리아 제도), 그리고 브라질의 산타카타리나주, 마르케사스 제도, 캄차카 반도를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 출발으로부터 1년과 2개월, 180 문화원)년 9월에 나가사키항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나가사키에 붙었지만 막부와 ​​러시아와의 협상은 잘 진행되지 않고 통역의 선육 이외의 귀국조 4명 「쓰타오, 의병위, 타쥬로, 사다히라」는 나가사키에서 잠시 발 멈추게 됩니다 .


조난으로부터 수년, 긴 여행도 끝을 잡는다

1805(문화 2)년 3월, 막부와 러시아의 이야기도 서로 접해가 귀국조 4명은 드디어 일본으로 인도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접이 붙었다고는 해도 고향에 돌아가는 것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고, 나가사키로부터 최초로 보내진 것은 에도의 「센다이 번 위 저택」이었습니다.

여기서 4명은 난학자의 오츠키 겐자와와 시무라 히로시로부터 사정 청수를 받게 됩니다.

이 듣기를 한 내용은 「환해 이문」으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 후, 1806(문화 3)년, 4명은 12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만 타이토로와 의무위는 같은 해에 죽어, 쓰타오는 1814(문화 11)년, 그리고 좌평은 다음 해 1829( 문화 12)에 사망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에 남은 귀화조는 그 후 불명이 되고 있습니다만 통역으로서 활약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남아 있습니다.


요약

일본인 최초가 된 「세계 일주」는 미증유의 조난으로 시작되어, 16명의 인생을 크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혹시 현재 러시아에는 귀화조의 후손도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이 「수기한 세계 일주」의 이야기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재, 와카미야마루가 출항한 이시노마키시에서는 「이시노마키 와카미야마루 표류민의 모임」이 결성되어, 현재도 조사 등이 진행되고 있다 합니다.

덧붙여 이시노마키시의 선창사에는 와카미야마루 승무원을 위한 공양비가 세워져 있으므로 이 기회에 발길을 옮겨 보는 것도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선창사 <Information>

  • 소재지 :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 야마시타초 1가 4-8
  • 수호 이익 : 이시노마키 굴 33찰소 영장 제24번 찰소

Google Map


그리고 마지막으로, Wikipedia로부터의 인용이 됩니다만 와카미야마루에 승선하고 있던 16명의 상세한 정보를 기재합니다.

직책성명조난시 연령출신지조난 후 발걸음
오키 선두
(선장)
헤이베이31무카군 이시노마키선주인 요네자와야 히라노유키의 아들. 관정 6년 6월 8일(1794년), 알류샨 열도에서 병사. 향년 32세.
楫取
(조타 손)
왼쪽 타이오51미야기군 우라도 제도 한풍자와시마이르쿠츠크에서 페테르부르크로 향하는 도중에 병 때문에 낙오하고 이르쿠츠크로 돌아갔다. 그 후의 소식은 불명.
뇌물
(사무장)
의병위(의평)32모모이군 후카야 무로하마귀국해, 무로하마에 귀향했다. 귀향한 문화 3년(1806년)에 몰렸다. 향년 45세.
배 아버지
(갑판장)
요시로지(요시로지)67무카군 고타케하마관정 11년 2월 28일(1799년), 이르쿠츠크에서 병사. 향년 73세.
수주
(선원)
쓰타오49미야기군 우라도 제도 한풍자와시마귀국해, 한풍택으로 귀향했다. 문화 11년 7월 29일(1814년)에 사망. 향년 70세.
좌평31미야기군 우라도 제도 한풍자와시마귀국해, 한풍택으로 귀향했다. 분정 12년 4월 12일(1829년)에 사망. 향년 67세.
민노스케30미야기군 우라도 제도 한풍자와시마이르쿠츠크에서 세례를 받고 러시아로 귀화했다. 세례명은 이반 메이트로비치 키세류프. 페테르부르크에서 황제 알렉산드르 1세에 러시아 잔류를 희망했다. 그 후의 소식은 불명.
은사부로29미야기군 우라도 제도 한풍자와시마이르쿠츠크에서 페테르부르크로 향하는 도중, 병 때문에 페르미에서 낙오. 이르쿠츠크로 돌아왔는가? 문화 9년(1812년)의 시점에서, 병으로 잠든 상태가 되어 있었다.
모지로29무카군 고타케하마페테르부르크에서 황제 알렉산드르 1세에 러시아 잔류를 희망했다. 그 후 세례를 받아 러시아로 귀화했다. 세례명은 자할 부르다코프? 문화 9년(1812년)의 시점에서, 이르쿠츠크에 있던 노미 회사의 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시 고로29무카군 이시노마키관정 8년 10월 23일(1796년), 오호츠크에서 이르쿠츠크로 향하는 도중에 야쿠츠크에서 병사. 향년 32세.
야사부로25리쿠 오쿠 국 모리 군 이시 노 마키이르쿠츠크에서 세례를 받고 러시아로 귀화했다. 세례명 세명 그레고레비치 키세류프. 페테르부르크에서 황제 알렉산드르 1세에 러시아 잔류를 희망했다. 그 후의 소식은 불명.
젠록24무카군 이시노마키이르쿠츠크에서 세례를 받고 러시아로 귀화했다. 세례명은 표토르 스테파노비치 키세류프. 관정 8년(1796년)에 이르쿠츠크의 일본어 학교 교사 보가 되어, 문화 12년(1815년)부터 정교사. 페테르부르크에서 황제 알렉산드르 1세에 러시아 잔류를 희망했다. 레자노프의 일본행에 수원으로서 참가했지만, 페트로파브로프스크에서 하선했다. 문화 10년(1813년)에 골로닌의 인수를 위해 러시아 측 통역으로 하코다테를 방문했다. 문화 13년(1816년) 무렵에 사망. 향년 47세. 계우위문이나 나카가와 고로지 등 러시아에 표착, 연행된 일본인의 신세도 했다.
태주로23모모이군 후카야 무로하마귀국해 무로하마에 귀향했다. 문화 3년 4월 1일(1806년)에 사망. 향년 36세.
타츠라22미야기군 이시하마이르쿠츠크에서 세례를 받고 러시아로 귀화했다. 세례명은 안드레이 알렉산드로비치 콘드라토프. 페테르부르크에서 황제 알렉산드르 1세에 러시아 잔류를 희망했다. 문화 9년(1812년)의 시점에서, 톰스크의 마차역에서 일하고 있었다.
청장미상무카군 이시노마키이르쿠츠크에서 페테르부르크로 향하는 도중, 병 때문에 낙오하고, 이르쿠츠크로 돌아왔다. 문화 9년(1812년) 시점에서 앙가라 강과 바이칼 호수를 오가는 선원이 되었다.

(선원견습)
巳之助21무카군 이시노마키페테르부르크에서 황제 알렉산더 1세에 잔류를 희망했다. 그 후 세례를 받아 러시아로 귀화했다. 세례명은 미하일 제라로프? 문화 9년(1812년) 시점에서 앙가라 강과 바이칼 호수를 오가는 선원이 되었다.
인용원 : Wikipedia 「 와카미야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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